속기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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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3-04-07 17:32
속기학원은 천직이다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294  

속기학원은 천직이다

이 수 만 (한국컴퓨터속기학원 원장, 대구경북언론인회 사무총장)


2020년 2월부터 21, 22, 23년 3월까지 3년간은 코로나19로 인해 참으로 힘들었다. 마스크를 써야 하는 불편도 있었지만 경제적으로 힘든 사람이 세계적으로 많았다.우리 속기계도 운영이 어려워 속기학원의 문을 닫은 곳이 많다. 

 

나 역시 돈만을 생각했다면 오래전에 폐원(閉院)을 하고 다른 것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속기학원은 천직(天職: 타고난 직업이나 직분)이라고 생각해 왔기 때문에 수강생이 1명이나 2명뿐이라도 결코 문을 닫을 수 없는 것이다. 한 때는 대구 경북에 컴퓨터속기학원이 8곳이었으나 지금은 한 곳밖에 없다.

 

길을 가다보면 오르막이 있다가 내리막도 있고, 내리막이 있다가 오르막도 있기 마련이다. 한 가지를 꾸준히 오래 하다 보면 좋은 일도 있고 어려운 일도 있기 마련이다.코로나 직전에 학원 앞 한의원이 나가버렸다.  월세 350만 원을 받던 것이 도리어 관리비를 매월 80만 원씩 물어야 하고 은행 빚 이자는 자꾸 올라서 3년간 마음고생이 참으로 많았다. 그런데 지난 2월 말 치과의원에 계약, 5월부터 월세를 받게 되어서 걱정을 덜게 되었다.

 

이런 어려운 경우는 과거에도 몇 번 겪었다. 오랫동안 함께 했던 부원장이 다니고 있는 수강생을 대부분 데리고 나가서 바로 옆 건물에서 ‘타자속기’를 ‘컴퓨터속기’라고 가르칠 때 너무나 힘들었다.  그 후 일반 키보드에 약자를 넣은 ‘넥스젠’이라는 컴퓨터속기를 가르쳤으나 합격자를 내지 못해서 속기계를 떠났고, 나는 대구 최초 ‘CAS’ 컴퓨터속기를 가르쳐서 수많은 제자들을 배출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과거 나한테 수필속기를 배운 사람들이 지방의회에서 속기사 공무원으로 근무하다가 지난해부터 정년 퇴직을 하고 있다.내가 속기를 처음 접한 것은 1965년 군위군 의흥중학교 3학년 때이다. 전주에서 오신 정아랑 선생님이 한 시간 동안 한글기음식 속기를 특강하고 가시면서 프린트물로 된 서너장의 한글속기 맛보기를 팔고 가셨는데, 나는 전교 학생회장이라서 공짜로 얻어서 보았다. 

 

대구상고에 입학을 했으나 상업과목에 흥미를 잃어 웅변을 배우면서 속기학원을 찾았으나 대구에는 한 곳도 없었다.
그래서 서점과 헌책방을 뒤져 여러 가지 속기책을 샀다. 그러나 같은 글자는 ‘가’자 밖에 없고 다 달랐다. 내가 익힌 정아랑 선생이 지은 유인물을 기본으로 해서, 남천식 일파식 등 속기를 독학으로 공부하였다.

 

1969년 영남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해서 다니면서 한국웅변속기연구원을 차려 웅변과 속기를 가르쳤다. 결혼 후 군위군과 경상북도에서 행정공원을 4년간 한 후 영남일보 기자 시험에 합격이 되어 언론계로 자리를 옮겼으나, 전두환 정권의 언론통폐합 조치로 대구매일신문사로 넘어갔다.

 

신문사를 두 개 합했으니 기자가 배로 많아져서 사직을 강요받고, 나갈 준비를 하게 되었다.  웅변은 제자들이  웅변 스피치학원을 하고 있어, 상도의상 할 수없어 못하고, 속기 과외교습으로 한국속기연구원을 개원하여 언론계를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다니던 신문사에서 ‘넘버원을 찾아서’ 라는 시리즈에 ‘속기사 이수만 씨’라고 대문짝만하게 소개되어서 난리가 났다. 그 기사를 신문사 간부들이 보고 사회부 기자를 시켜주어서 속기학원과 신문기자를 같이 할 수 있었다.


속기학원에 부원장, 강사, 상담, 경리, 운전기사 등 6명의 직원을 채용하여 운영했다. 대한민국에서 말단 기자가 운전기사를 채용해서 자가용을 타고 다닌 사람은 나밖에 없었을 것이다.  애들이 어려서 돈을 쓸 사람이 없어 몇 년 만에 많은 돈을 모을 수 있었다.


1988년 신민주공화당 김종필 총재 특별보좌역에 발탁되어 제13대 총선에 출마, 엄청난 돈을 내다버렸다. 지금은 고인이 된 유승민 전 의원의 아버지 유수호 변호사(노태우 대통령 동기), 김현규 의원(신민당 원내총무) 등과 경쟁을 하였으니 지금 생각해보면 대단히 어리석은 일이었다.  어쨌든 속기학원 덕분에 대구 중구에서 국회의원 세 번, 중구청장 두 번, 대경신문 발행인 (대표) 등으로 많은 돈을 내버릴 수 있었다.

 

어려움이 있을 때 하느님을 원망하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정말 너무나 공평하다고 생각한다. 누구든지 백퍼센트 만족 하는 사람은 없다는 것을 안다. 행복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나는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돈이 풍족하지는 않지만 사남매가 제때 결혼해서 한 집에 둘씩 애를 낳아서 8명의 손자 손녀로 부자다. 모두 건강하고 학급 회장과 부회장을 맡고 공부를 잘하니 기분이 좋다.

 

우리 집은 속기사 가족이다. 장남은 속기학원 부원장 겸 한국녹취사무소 대표이며, 큰 며느리도 속기 자격증을 따서 녹취사무소 일을 하고 있다. 딸 둘도 컴퓨터속기 자격증을 따서 법원 속기직 공무원을 한 지 오래되었다. 차남만 속기 관련 일을 하지 않고 일반 회사에 다니는데, 딸 둘 중 하나는 속기직 공무원을 만들자고 약속했다.

 

내 나이 벌써 70대 중반으로 빠르면 5년 길어야 10년 여생이지만 요즘도 열심히 살고 있다. 오전 8시에 집을 나서면 지하철을 타고 8시반 속기학원에 도착, 9시 반까지 속기를 가르치고, 가까운 유림(儒林)단체인 춘추회(春秋會)에 출근해서 상임부회장으로, 또 대구경북언론인회 사무총장으로서 일을 본 후 매일 지인들과 맛있는 중식을 먹는다.

 

오후에도 속기학원에 가서 내일 교재 녹음을 하고, 오후반 속기 강의를 한 후 여러 사람을 만난다.  저녁 6시 반부터 야간반 지도를 한 후 빨라야  8시 반에 아내와 퇴근을 한다. 항상 바쁘지만 늘 감사한 마음으로 살고 있다.